[녹색시선] 이론이 죽은 시대의 조경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2-12-13
이론이 죽은 시대의 조경
글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우리는 이론이 죽은 시대에 조경을 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이 죽었다는 이론”이 지배적인 담론이 된 시대에 조경을 하고 있다. 이론이 죽었다고 하면 어떤 이들은 반문할 것이다. 탄소중립, 회복탄력성, 인공지능, 빅데이터, 이런 새로운 개념들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오히려 이론의 과잉 아닌가?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굳이 실천적인 조경이라는 분야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이론이 꼭 필요한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에게 질문을 한번 던져 보겠다. 당신은 어떤 조경을 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런 조경을 왜 하는가? 헌장에나 나올 그럴듯한 상식적인 대답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상식의 조경이 아닌 “당신”의 조경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이론이 죽었다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론은 실천과 반대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연예론, 요리 이론, 주식투자 이론 같은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기술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금 우리가 조경의 이론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방법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이론과 실천을 반대의 의미로 규정한 이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돌아가신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서양 윤리학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이론(Theoria), 실천(Praxis), 제작(Poesies)로 구분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은 이론이 실천과 제작과 구분될 뿐 아니라 한 단계 수준이 높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실천과 제작은 그 행위 자체 말고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보통 우리는 먹기 위해서 요리를 하는데, 요리는 먹는 행위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론을 사유하는 행위, 예를 들어 천체의 움직임을 탐구한다는 행위는 순수이 알고자 하는 사유 행위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더 수준이 높다. 이론(Theoria)은 조망이라는 뜻의 “θέα”와 보다라는 뜻의 “ὁρᾶν”이 합쳐진 어원을 갖는데, 이를 풀이하자면 이론은 현실의 대상에서 떨어져 관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론은 실용적이며 기능적인 행위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실용성이 배제된 특별한 사유의 행위이다. 고전적인 관점에 볼 때 이론은 수학, 철학, 미학, 물리학 등의 순수 학문의 대상이지만, 도구적인 목적을 가진 군사학, 수사학, 공학, 건축이나 조경은 이론에 해당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당신을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 봐. 내 생각이 맞았잖아. 이론은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논문 쓸 때나 필요한 것이지, 실천적인 조경에는 오히려 불필요하다니까.
그런데 조경이 실용적 기술이기 때문에 굳이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면 조경이 굳이 학문까지 될 것도, 조경학과가 대학에 있을 필요도 없다. 조경이 조경학이라는 학문이 되려면 실천과는 괴리가 된 이론으로 성립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조경학보다 앞서 정립된 건축학 역시 이와 같은 딜레마에 부딪힌다. 그래서 건축은 다른 학문 분야보다 늦게 17세기 무렵에야 학문으로 인정받고 고등교육 기관이 생긴다. 건축은 실천과 이론의 딜레마를 건축을 예술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건축은 건물을 짓는 실용적 행위이지만, 건축 이론은 오히려 건물 짓기와는 무관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논하는 담론이다. 그래서 건축은 학문이 될 수 있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실용적인 공학을 다루는 에콜 폴리테크(École Polytechnique)와 순수예술을 다루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로 대학이 구분되었을 때, 건축학은 실용적 공학이 아닌 예술이 되고자 보자르에 남는다. 미국에서 전문분야로서의 조경이 성립했을 때 조경의 아버지들은 조경의 사회적 역할과 실용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조경학을 도입할 때만큼은 건축의 보자르식 교육과 학문체계를 그대로 따랐다. 실천적 조경도 실천적이지 않은 조경 이론을 전제로 해야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건축이나 조경과 같은 실천의 분야가 이론적으로 실천과 무관한 척할 수는 없었다. 20세기 초 철강, 콘크리트, 유리 등의 새로운 건축 재료가 등장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건물을 짓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더 값싸고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자유롭게 건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건축이론은 기술과 기능에 초점을 맞춘 해석을 제시해야 했고 새로운 실천과 이론은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었다. 20세기 동안 건축이론은 모더니즘을 지지하던, 반대하던 모두 모더니즘 이론이 구축한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20세기의 조경 이론 역시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과학에서 다양한 이론이 등장함에 따라 건축, 도시, 조경의 분야도 이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직도 우리가 이론서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이즘과 사조들, 그리고 건축과 조경의 실험은 20세기 후반의 성과이다.
건축사가 말그레이브(Harry Francis Mallgrave)는 1990년대를 건축이론의 황금기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한 시대가 황금기라는 것은 곧 다가올 다음 세대는 쇠락기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론에 대한 반란의 불씨는 2000년대 초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고, 그 선봉에는 렘 쿨하스(Rem Koolhaas)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당시 미국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이 건축이론의 황금기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주류 이론은 소위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라고 불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판이론은 건축이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더 낳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토대를 두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학교에서 건축과 조경이 사회와 공공에 기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배우는데, 이러한 류의 생각이 바로 비판이론인 것이다. 쿨하스는 비판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공공에 기여하는 건축만이 좋은 건축이 되었는가? 왜 건축은 백화점, 리조트 같은 나쁜 건축과 박물관, 도서관 같은 좋은 건축으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건축은 자본이 없이는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 있는 민간의 건물이 더 좋은 건축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차라리 건축이 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윤리적 강박에서 벗어난다면 건축은 훨씬 자유로워지고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건축이론은 오히려 건축을 옭아매는 족쇄와 같다. 이렇게 쿨하스는 기성 이론을 파괴하는 정교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젊은 세대는 그의 견해에 동조했고, 21세기의 건축가들은 20세기의 진지함과 엄숙함을 벗어던지고, 더 재미있고, 개성있고, 자유롭고, 거기에다 더 돈도 잘 별수 있는 건축을 추구하게 된다.
렘 쿨하스의 라 빌레뜨 공모전안 ⓒOMA
렘 쿨하스의 저서, Derilious New York ⓒOMA
OMA의 백화점, 갤러리아 광교 ⓒ홍성준, OMA
실용적 기술인 건축과 조경이 예술이 되면서 이론이 되었고, 기술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더니즘 이론이 등장하고, 모더니즘 이론은 공간이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비판이론으로 발전하고, 다시 극단적 실용주의가 비판이론을 파괴하여 모든 이론적 족쇄에서 벗어난 지금, 당신은 어떠한 조경을 하고 있는가? 이제 아무도 이론을 말하지 않다고 해서, 이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조경가들의 서재에 이론서 대신 브랜딩과 트랜드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고 해서 이론이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요즘 모두가 자연적 식재를 한다. 마치 다른 식재기법은 금지된 것처럼, 모두 사초로 매트릭스를 만들고 구조를 잡아주는 키 큰 숙근초를 배치하고 곳곳에 시선을 끌 수 있는 꽃들로 사계절의 경관을 연출한다. 그런데 왜 당신은 자연적 식재 기법만을 도입하고 있는가? 다들 우리의 경관을 닮은 자연스러움과 생태적으로 건강한 식재 환경을 위해서 그런다고 한다. 그런데 저런 경관이 도대체 우리나라 어디에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있었는가? 우리의 선조들이 저런 정원을 연출한 적이 있는가? 설마 당신이 애정하는 자연적 식재가 사실은 19세기 영국의 조원가들이 개발한 극히 영국스러운 식재기법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닌가? 최소한 당신이 선망하는 우돌프식 식재기법의 모델이 미국과 유럽의 자연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엄청난 유지관리의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고 믿겠다. 당신은 왜 고전적인 구조물보다 UHPC를 활용한 유선형의 구조체를 사용했는가? 당신은 패러매트릭을 활용한 패턴과 같은 모듈로 조립이 불가능한 당신의 설계가 기존의 방식보다 몇 배나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의 조경은 무엇이기에, 클라이언트에게 많은 비용을 쓰게 하면서 그런 조경을 추구해야 하는가? 외국에서도 했다는 변명이나 단지 멋있고 새로운 조형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보다는 더 그럴듯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 있다. 이론은 당신의 조경을 정당화하고 설명하려고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론의 힘과 필요성의 그 반대의 지점에 있다.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 교수는 이론의 힘은 우리가 이미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데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론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고, 늘 익숙한 습관에서 괴리 될 때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론은 그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떨어져 관조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론의 발전 과정은 실제로는 기성을 부정하는 과정이었다. 이론은 건축과 조경이 실용적 기술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정하여 실용적이지 않은 예술로 규정한다. 다시 모더니즘은 건축이 순수한 예술이라는 기존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기능적 미학을 창조한다. 비판이론은 기능과 미학의 담론을 벗어나 공간의 힘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다시 쿨하스는 이론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모든 이론적 개념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조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디에 주워들은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와 환경을 보존하고 만드는 것이라는 대답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조경의 당위이지 당신의 조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에게 이론이 없다면 당신은 남들이 떠드는 조경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떠들 수밖에 없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궤적을 따라가며 남들이 해놓은 것들을 주워 먹을 수밖에 없다. 이론은 부정의 힘이다. 지금까지 내 것인 줄 알았던 남의 조경을 부정하는 힘, 그를 통해 나의 조경이 떠오르게 하는 힘은 이론에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경가들은 자신을 부정해보았던 조경가들이 새롭게 만들어놓은 길을 평생 따라가는 조경만을 한다.
다시 묻겠다.
당신은 어떤 조경을 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런 조경을 왜 하는가?
왜 가짜 식물을 썼는가? 유지관리가 어려워서라서 그랬다는 변명은 말라. ⓒ김영민
왜 광장의 한 편을 비웠는가? 광장은 비워진 공간이라는 당위를 말하지 말라. ⓒ이진택
왜 그곳을 운동공간으로 바꾸었는가? 시민들이 원해서라는 핑계는 대지 말라. ⓒ유청오
- 글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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