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소_ 뿌리뽑힌 이야기, 우리만 모르는 ‘장소’(上)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_10회머릿속에 하나의 장소를 떠올리며 답해보자. 언제부터 장소였는가? 어떻게 장소가 되었는가? 어떤 장소라 할 수 있는가? 답이 바로 떠오른다면 하나 더, 그렇다면 장소는 무엇인가? 떠오르지 않았거나 장소를 모르겠다면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반대로 쉬운 질문들이었다고 해도 할 일은 많다. 우리 시대 여러 분야에서 다루는 장소(개념)를 어디에서부터 살펴야 할까?
뿌리뽑힌 장소들, 사람 없는 이야기
우리가 우리 도시의 장소(성)를 모르는 이유는 그 곳에 담긴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알다시피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도시의 경관과 공간, 개발의 모습들 때문이다. 또 이곳저곳을 쉽게 이동하며 대지와 정붙일 여유도 없이 유목하듯 우리 도시를 누비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짜인 교통수단들의 네트워크로 분절된 도시에서 그 분절된 대지의 일부를 옮겨 다니기 바쁘다. 삶터와 맺는 이야기가 누추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장소는 그런 우리 모습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장소(성)를 규정하고 그것을 도시에서 지켜내려 노력한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소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쉽게 규정하지 못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쉽게 이해되고 다룰 수 있었다면 세계의 도시들이 이미 장소 가득한 활기 속의 삶터가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학자와 이론가, 실천가들의 노력에 무엇인가 놓치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장소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관련된다. 삶터에 펼쳐놓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 이야기는 희로애락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역사와 문화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생태와 커뮤니티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크게는 국가와 민족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이 지구와 우주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다양한 층위를 가지며 사람들 삶 그 자체를 다루면서 거주 주변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게 된다. 개인의 차원, 커뮤니티의 차원, 사회문화적 차원, 국가민족적 차원 등 장소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층위는 얼른 나누어도 몇 단계를 거치며 확장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지난 시대 장소가 사라지고 장소성이 지워지게 된 것은 삶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라졌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것은 급격한 개발이나 변화와는 다른 측면에서 장소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장소를 생각하며 놓쳐버린 부분으로 다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뿌리뽑힌 장소들은 사실 자리 잡지 못한 이야기들,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의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을 삶터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장소(성) 되찾기, 장소 만들기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장소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은 그 다음의 고려 사항이다. 따라서 우리 도시의 장소를 살피고 장소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의 머릿속에서만 떠돌고 있는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 덩치를 키워가며 하나 둘 터에 안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도시의 전문가들은 삶터 주변의 우리들, 사람들의 이야기에 하나 둘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하는 주인공 도시와 관리되는 결과물 도시
근대 이후 도시들은 삶터를 거대한 기계로 보면서 가꾸어 왔다. 고밀이든 저밀이든 도시의 삶터들은 그렇게 짜인 틀 속에서 형성, 변화,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르꼬르뷔제의 그 유명한 “집은 주거를 위한 기계”라는 시각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분명하지 않은 것들은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하나 둘 멀어지게 되었고, 효율성과 형평성에 입각한 삶터의 분절이 팽배하게 되었다. 변화는 계속되어 지난 세기 말부터는 그런 기류가 새로운 틀로 진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준 바 있다. 장소(성)와 장소의 가치가 주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오귀스탱 베크가 말하듯, “장소는 존재자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다.” 장소는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의 체험과 관찰에 의지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장소를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물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근대적 시각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이를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나타나게 된다.
그런 이론들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중요한 것은 앞서와 같이 이야기를 그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론들이 밝혀놓은 가이드라인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니 오해는 말자. 다만 그들이 장소를 물리적 실체로 보아 정작 장소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본질적 속성, 말하자면 장소를 형성하는 기제들을 뒷전에 밀어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힐(Jonathan Hill, 1958~ )이 사용자를 세 단계로 나누어 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사용자를 ‘수동적, 반응적, 창조적’이라는 세 단계로 구분한다. 주어진 도시건축 서비스를 사람들은 그렇게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누군가 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 우리 삶터가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음에 대한 자각이자, 사람들의 행태를 수용하기 위한 시작이다. 필자는 그와는 다른 접근과 입장에서 이 중 도시에서의 창의적 이용자에 대해 ‘이용가(利用家)’라 따로 이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장소에 담기는 이야기가 어떻게 창의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가는 대표적 반달리스트 취급을 받는 스케이트보더를 통해 지적된 바 있다. 도시의 음지가 되다시피 한 장소에 그들은 놀이를 통해 활력을 불어넣는다. 멀쩡한 것에 피해를 주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좋지 않은 장소들로 더 발길을 향하는 것이다. 또 양지라 할만 한 장소에서도 그들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도시의 물리적 구조물들을 활용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로 장소의 사용법을 창의적으로 확장시킨다.
도시를 창의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도시에 펼쳐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근대 이전의 삶터에는 그렇게 펼쳐진 이야기들이 하나가득이었고, 그것들끼리의 이합집산에 의해 삶과 삶터가 재편되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장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주어진 서비스에만 만족하고 그 틀에서만 삶터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도시를 기계로 다루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창조적 사용자는 스스로 이야기를 삶터와 섞을 줄 아는 진정한 일상인이자 이용가이다.
따라서 관리되는 도시도 중요하지만 이제 새로운 재생과 장소 발현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이용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삶터와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도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등 거대한 이론 속의 그것이 아님도 잊지 말자. 그것은 일상 속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일 뿐이다.
- 글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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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_ 나창호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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