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진짜 조경은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2-08-08
진짜 조경은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얼마 전 한 설계사무소 소장님이 넋두리를 하셨다. 아끼던 직원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직원은 대뜸 소장님에게 “진짜 조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았다. 소장님이 머뭇거리자 직원은 자기는 그동안 사이비 조경을 해온 것 같다고, 이제 진짜 조경을 하기 위해 떠나가겠다고 선언하고 제주도에 내려갔다고 한다. 소장님은 20년 넘게 설계를 해왔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조경이 가짜 조경이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그것도 동고동락해온 직원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고 씁쓸하게 말씀하셨다.

“참된 조경은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The “real landscape architecture” only exists in the drawings). 이는 내가 아니라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이라는 건축가가 한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가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참된 건축은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The “real architecture” only exists in the drawings). 여기에 건축을 조경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은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아, 요새 건축은 잘 지어지는 건축보다 멋있는 이미지로 제시되는 건축이 인기인가 보다고. 


프란시스 케레(Francis Kéré)의 외과병원 및 헬스센터(Surgical Clinic and Health Centre )


왕슈(Wang Shu)의 닝보역사박물관(Ningbo History Museum)

그렇지 않다. 최근의 건축 동향을 한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현란한 이미지와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건축보다 진솔한 물성의 건축이 대세이다. 건축가에게 최고의 영예라는 프리츠커(Pritzker) 상의 수상자들을 보면 오늘날 가장 높이 평가받는 건축이 어떠한지를 이해하기 쉽다. 올해의 수상자인 디베도 케레(Diébédo Francis Kéré), 그리고 발크리쉬나 도시(Balkrishna Doshi), 시게루 반(Shigeru Ban), 왕슈(Wang Shu)와 같은 최근의 수상자들을 보면 모두 물성과 현상의 건축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다. 화려한 형태와 첨단기술보다는 물성과 디테일을 건축의 본질로 추구하는 피터 줌터(Peter Zumthor)나 헤르족 드 뮤론(Herzog de Mureon)의 건축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왜 아이젠만은 오늘날 지어지지 않는 건축만이 진실한 건축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일까?

‘참된 건축’은 종이 안에서만 존재한다. ‘참된 건물’은 그림밖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차이는 ‘건축’‘건물’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젠만은 건축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묻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건축과 건물이 같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건축은 건물이 아니다. 건물은 건축의 대상이자 결과물이다. 같은 질문을 조경에 적용하자면, 사람들은 조경을 공원이나 정원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공원이나 정원은 조경의 대상이지 조경이 아니다. 숨을 고르고 한번 생각해보라. 조경은 정원인가? 조경은 공원인가? 아니라면 조경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날의 건축에는 계속되는 논쟁이 있다. 개념적, 문화적, 지적 기획으로서의 건축과 현상적 기획로서의 건축이다. 현상학적 기획으로서의 건축은 주체의 경험, 즉 물성, 빛, 색, 공간 등등의 경험에 대한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런 현상학적 건축에 반대해왔다. 나는 디테일이나, 나무의 결, 표면에서 나타나는 물성의 색 따위를 걱정하는데 시간을 쓰는 피터 줌터와 같은 이들의 작업에는 관심이 없다. 하등도 관심이 없다. 모두들 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종이 건축(Cardboard Architecture)”의 개념은 ‘반-물질적(Anti-material)’ 언명이 건축의 물질적 물성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주택(House) II


주택(House) VI의 개념도

아이젠만은 1967년 주택 1(House I)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1975년의 주택 10(House X)까지 10개의 주택 연작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들을 종이 건축이라고 규정한다. 이 말은 원래 미국의 건축가인 라이트(Frank L. Wright)가 유럽의 아방가르드 건축을 대표하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건축 모형 만들 때나 쓰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것 같다고 비꼬기 위해 쓴 말이다. 아이젠만이 모더니즘 건축을 경멸적으로 표현한 종이 건축을 자신의 건축개념으로 제시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 건축계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 1965년 르 코르뷔지에라는 거장의 죽음은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모더니즘 건축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961년 제이콥(Jane Jacob)이 모더니즘 도시 모델을 신랄하게 비판한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 대중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벤추리(Robert Venturi)는 1964년 모더니즘을 조롱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1966년 건축의 복잡성과 대립성(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라는 문제적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막을 연다. 이렇게 1960년대 중반, 모더니즘 건축의 사망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아이젠만은 종이의 건축을 통해 두 가지 모순된 건축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모더니즘의 계승이며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의 부정이다. 종이 건축이라는 개념을 차용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과 그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의 모더니스트 테라니(Giuseppe Terragni)의 건축을 계승하고자 한다. 아이젠만이 볼 때 모더니즘은 끝나지 않았다. 모더니즘 건축은 스스로 제시한 새로운 가능성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았다. 그는 중도에 좌절된 모더니즘 건축을 완성하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그는 모더니즘을 거부한다. 모더니즘에 가해진 모든 비판은 정당하다. 모더니즘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더니즘이 던진 본질적인 질문은 건축이 사회의 도구로서의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아니라 건축이 무엇인가였다고 말한다. 건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규정해야 새로운 건축의 역할과 기능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은 스스로 세운 기획의 토대를 제대로 만들지도 않고 그 위에 기능주의, 신기술의 적용, 상징적 의미, 시대적 소명 등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그는 건축의 새로운 토대를 쌓고 건축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규정하기 위해서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단 하나, 건축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건축가의 창작 의지도, 건축에 대한 시대적인 요청도 아니다. 건축에 내제된 구조가 건축의 개념이며 본질이다. 그는 이를 심층 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른다.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보자. “한국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하자. 우리는 일단 영어나 중국어와의 차이점을 비교해보고자 할 것이다. 여러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발음도, 억양도, 단어도 다르다. 그런데 발음이나 억양 같은 특징은 문자가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단어는 꼭 다르지만도 않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는 한자어라 중국어의 단어나 한국어의 단어나 태반이 같다. 그렇다면 한국어를 규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의미를 형성하는 구조, 즉 문법 체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구조가 유사한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이탈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단어나 발음이 달라도 서로 언어를 이해한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의 본질은 건축을 건축으로 존재하게 하는 체계이며 이는 당연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이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이 언어와는 달리 물리적 실체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체계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필요한데, 이는 색, 물성, 두께, 빛 등 모든 물리적 특징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모형과도 같은 “종이의 건축”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이러한 개념의 건축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 주택 시리즈를 통해 실험한다. 각각의 주택은 서로 다른 건축의 개념적 실험이다. 주택 2는 건축의 개념 중 구조에 대한 실험이다. 건축은 입체적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기둥과 벽, 이 두 가지가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문법이 된다. 주택 2에서는 내력벽과 기둥 구조를 동시에 도입한다. 구조적인 과잉이다. 내력벽이나 기둥 중 하나는 없어도 되지만, 둘 다 없으면 건축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구조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내력벽, 혹은 기둥은 실용적 용도가 없기 때문에 건축의 의미가 발생한다. 둘 중 하나는 상징적 기호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아이젠만은 건축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구조적 체계에서 어떻게 건축의 의미와 상징이 발생하는지를 실험적으로 보여준다. 주택 6은 건축의 개념 중 과정에 대한 실험이다. 건축은 어떻게 공간적 실체이면서 시간적 실체일 수 있는가? 건축은 건축 과정의 최종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정의 시간적 기록이기도 하다. 과정의 구조 자체를 대상화한다면 대상화 된 과정은 영화의 장면과 같은 구조를 갖게 된다. 이때 순수하게 중성적인 개념적 구조인 과정에서 건축적 의미와 상징이 발생하며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건축이 될 수 있다. 

아이젠만은 건축의 본질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재료의 거칠고 매끈함, 적색과 청색, 어둡고 밝음 등의 물질성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건축가가 어떻게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가? 재료의 거칠고 매끈함은 돌과 나무라는 재료의 성질이지 건축의 속성이 아니다. 만약 물성이 건축의 본질이라면 물성이 배제된 건축은 건축이 아니다. 그러나 모형으로 제작된 건축,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도면 속의 건축, 컴퓨터로 모델링된 건축 모두 건축이다. 건축가가 물성을 건물에 적용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이는 물성 그 자체가 아닌 물성에 대한 건축적 개념이다. 디테일도 마찬가지이다. 목재와 석재가 만나는 건축적 디테일이 있다고 하자. 건축가가 제시하는 것은 건축적 디테일에 대한 개념이며 이는 도면이나 이미지, 즉 드로잉으로만 표현된다. 건축가느 직접 돌을 쌓고, 미장을 하며, 못을 박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는 건축가의 작업은 목수와 석공의 실천적 작업과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건축가는, 그리고 건축은 어떻게 디테일을 구현할지에 대한 개념만을 제시하고 관리한다.


피터 줌터(Peter Zumthor)의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Bruder Klaus Chapel)


피터 줌터(Peter Zumthor)와 핏 우돌프(Peit Oudolf)의 스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물론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전혀 공감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건축계의 주류가 되기에 아이젠만은 너무 어렵고 독선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과 건물의 차이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 둘이 분리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건축의 본질은 개념에 있다는 주장의 치밀한 논리와 방대한 이론적 근거는 그 누구도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이 공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이젠만의 건축보다는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피터 줌터의 건축이나 약자를 위한 사회적 공감의 울림을 주는 시게루 반의 건축에 공감한다. 아이젠만의 “참된 건축은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공감과는 상관이 없다. 그에게 진리란 공감의 결과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무엇인가가 아니다. 진리는 늘 불편하며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이질적이다. 아이젠만의 건축은 과거 모더니즘 건축이 무엇이며, 오늘날의 건축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이다. 그의 건축을 통해 왜 시대는 모더니즘을 택했으며 또 버렸는지, 그리고 그 유산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지어진 건축: 갈리시아 문화의 도시(City of Culture of Galicia)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지어진 건축: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Berlin Holocaust Memorial)

다시 조경으로 돌아와 보자. 지금은 지어지는 조경의 시대이다. 공감할 수 있는 조경의 시대이다. 인스타그램 조경의 시대이다. 텍스트와 이론의 조경은 인스타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받을 수 없고, 그래서 공감할 수 없고, 그래서 쓸데없어져 버렸다. 이제 아무도 겉멋으로나마 철학자의 책을 사무실에 갖다 놓지 않는다. 대학에서 현대조경사나 조경이론 과목은 개설되지 않은지 오래이다. 그런데, 유행하는 유럽의 자연식 정원풍을 조합을 자생종으로 바꾼 세련된 식재 디자인을 도입하고, 핀트레스트에서 본 듯한 이미지와 어딘가 닮은 공간을 섬세한 디테일로 풀어내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고객과 주민들이 잘 이용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면 이제 우리의 조경은 잘 지어진 것인가? 공감의 조경이 되는 것인가? 오해는 하지 말자. 아이젠만 식의 종이의 조경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종이의 조경은 절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조경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종이의 조경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비판적 사유가 없는 조경은 술(術)에 불과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경가들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조경을 왜 하고 있는가? 당신의 조경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조경을 해왔다면 분명 당신은 삶의 어느 순간에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진짜 조경은 무엇인가?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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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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