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떼루아(Terroir), 그리고 생태
김원현 논설위원(노아솔루션연구소 팀장)술을 즐겨 마시지 않던 필자가 유학시절 깜짝 놀라게 된 술이 있었다. 별로 비싸지도 않고 (슈퍼에 가면 3~4천원이면 산다) 독일에서는 흔하다면 흔한 리슬링이라는 화이트와인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셔서 부랴부랴 동네 슈퍼에 가서 사온 그 와인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의상 따라준 첫 잔을 받아 들고선 항상 그렇듯이 한 모금 입에 넣고선 눈치 슬슬 보면서 고사를 지내고 있었다(필자는 주량이 소주 반병이 채 되지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무래도 분위기상 안되겠기에 입에 몇 모금 더 넣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갓 딴 상큼한 청포도향이 입 안 가득 도는 것이었다. 아니 와인이 이런 맛이었어? 하며 계속 마시다 보니 금세 한 병을 다 비웠다. 황홀한 기분에 기분도 좋아지고 술김에 소믈리에를 해야겠다는 둥 하며 유난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와인은 시간이 갈수록 산화되면서 알코올의 역한 내음이 사라지고 화이트와인 본연의 맛이 드러나는 와인이라고 했다.
ⓒ Wikipedia terroir
와인은 제조의 성격상 그 해에 나는 포도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제조해 내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일단은 그 지역의 환경, 특히 기후가 포도 맛을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적으로 추운 독일과 일조량이 많은 이태리와 스페인 남부의 와인이 다른 것 같긴 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을 통칭하는 용어가 ‘떼루아’라고 했다.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단어다 했더니 몇 해 전 SBS에서 했던 드라마 제목이었다. 떼루아는 원래 토양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용어로 포도가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환경, 즉 토양, 강수량, 태양, 바람, 경사, 관개, 배수 등을 통칭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와인은 그 본연의 재료인 포도 보다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상표명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앞서 열심히 소개했던 물, 지형, 토양 역시 이 떼루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재배지역의 기후였다.
기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강하다. 특히 주거의 경우 극한의 추위를 지닌 남극은 이글루를 짓는 반면, 사시사철 해가 내리쬐는 아프리카 밀림은 야자수로 집을 짓는다. 그리고 이것은 문명이 발달을 해도 변함이 없다. 기후변화에 민감한 요즘은 물론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기후에 영향을 받는 건 똑같다.
기후변화와 관계된 내용은 기후대와 관련이 깊다. 통상적으로 한대, 온대, 열대로 나뉘는 기후대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온대에 집중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발달된 형태의 도시를 띠는 국가와 지역이 많은데, 여기에는 숨어 있는 내용이 한 가지 있다. 즉, 이들 도시들은 기후에 영향을 받지만 대부분 기후에 순응하기 보단 적응하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떼루아는 생태환경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 특히나 다양한 기후를 지닌 우리나라는 어찌보면 좀 더 역동적인 생태환경을 가질 수 있었다. 도시 앉음새에 걸맞춰 조경공간을 계획했다면 각 도시가 가지는 본연의 색깔을 좀 더 잘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생태공간은 생태자체에 요구하는 자생력을 갖출 수 있지 않았을까? 원래 우리가 살고 싶었던, 아니 살아야 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말이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당장 나가서 리슬링 한 병 사와야겠다.
- 글 _ 김원현 팀장 · 노아솔루션(주)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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