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의 여왕, 황지해의 ‘리얼스토리’ (1)
[특별인터뷰] 황지해 작가한국의 자연은 휴먼스케일에 맞는 너무 크지도, 왜소하지 않은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정원문화라는 인위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경관을 빌어오는 차경 문화가 발달 되어 있고 최소한의 자연을 훼손하며 최소한의 에너지를 이용한 독특한 정원문화를 이뤄왔다.
그러나 도시화를 관통하며 우리 정원을 대변하는 차경 문화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서양식 관점에서 환경을 지배하는 인위적인 환경 조성에 익숙한 형태가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 고유의 정원문화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유럽의 중심에서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주최하는 첼시플라워쇼를 통해 두 번의 메달리스트가 되어 최고의 영예를 안으며, 한국의 정원문화를 세계의 정원문화 속에서 각인시킨 황지해 작가의 등장은 실로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김봉진 녹색기자(아리울씨앤디 대표이사)
박상아 녹색기자(서울시 서울혁신기획과 마을공동체담당관 청년활동가)
이주경 녹색기자(한국토지주택공사 건설사업부 인턴)
[특별인터뷰] 첼시의 여왕, 황지해의 ‘리얼스토리’
이야기 하나_쌓여가는 열망, 그리고 현실
황지해 작가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 전 그동안 보도된 기사와 잡지,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속에는 그녀의 본질적 내용 보다 ‘첼시플라워쇼’에만 지나치게 조명되어 황지해 작가의 인간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의 관점을 수상에 대한 성과보다는 그러한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만든 정서적 관점과 관념, 그리고 성장 배경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인간 황지해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황 작가는 본래 순수예술로서, 미술을 공부했다. 순수미술로서 맞닥뜨린 생계적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가난한 미술학도들을 모아 환경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황 작가 활동의 홈그라운드인 ‘뮴’이다. 현재 이 곳은 황지해 작가의 동생이 운영하고 있다.
황지해 작가는 1999년부터 환경미술 작업을 해오며, 현장의 억척순이가 되어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본질에 대해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그녀를 만든 중요한 성장점이 바로 이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순수미술에서 환경미술로 바꾸는 것을 금기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절실했다.
처음 벽화로 시작했던 작업이 조형물로, 조금 지나 공공미술로 점차 범위를 넓혀 나가게 됐다. 성과들도 하나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단순히 정해진 설계도 안에 조형물을 놓으려 하니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갑갑함이 치고 일어났다.
조형물과 주변 환경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다 수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경의 영역에서 새로운 황지해를 표현하게 되었다. 그녀는 조경도 디자인의 한 표현 방법일뿐 절대적인 틀 안에 본인을 가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박상아(이하 박): 우리나라에는 첼시플라워쇼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없었는데, 어떻게 첼시플라워쇼에 나가실 생각을 하시게 된 건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황지해(이하 황): 첼시플리워쇼와의 인연은 2002년 이었던 것 같다. 러시아 탐험가 친구에게 첼시플라워쇼CD를 선물로 받았었다. 그 CD를 맨 처음 보았을 때 망치로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모조리 러시아어로 써 있는 바람에, 우리 동네에 있었던 나이트 쇼걸에게 번역을 부탁했다(웃음). 이 거대한 행사의 이름이 ‘첼시 플라워쇼’임을 알게 된 나는 그 행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거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데!’
박: 왜 바로 첼시 플라워쇼를 준비하지 않았었는지?
황: 일하는 내내 가슴 속에 첼시 플라워쇼는 계속 있었다. 하지만 차마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버릴 수 없었다. 나갈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원래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생계 문제에 직면한 단계에서 작은 사무실이라도 얻고자 앞만 보고 달려갔다. 디자인하고 현장에서 닥치는 대로 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야기 둘_작지만 큰 도전
가슴 속에 첼시플라워쇼를 품고 있었던 황지해 작가는 결국 영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영국행을 결정했던 건 첼시의 출전 목적도 있었지만 조경학 공부를 위한 것도 있었다. 학교는 교수 인터뷰만 남은 상태였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그와 동시에 첼시플라워쇼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덜컥 주어져 버렸다.
수상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첼시플라워쇼를 참가해야 하느냐를 두고, 황작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참가하게 된다면, 열심히 모아온 전 재산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했으니 학교와 첼시플라워쇼에 대한 고민은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박: 어떻게 대학교를 미루고 첼시플라워쇼에 출전하게 된 건가요?
황: 학교와 플라워쇼 사이에서 고민하던 당시엔, 첼시 플라워쇼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어떤지 몰랐다. 영국의 지인에게 쇼에 참가한다고 말하니 반응이 대단했다. 나를 우습게 보던(?) 대학 교수마저 태도가 공손해졌다.(웃음). 다들 대학은 나중에 갈 수 있으니 무조건 첼시플라워쇼에 전념하라고 했다.
주위의 반응은 무조건 첼시로 향하라는 권유가 대다수였다. 심지어 지원했던 대학 교수마저 ‘대학은 나중에 오면 되니 너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그리고 상만 타면 내로라하는 스폰서들이 줄을 선다기에 도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다지 긴 인생은 아니지만 대학도 재수할 정도로 시험과 평가에 관한 부분이라면 운이 없던 삶이었기에 걱정과 고심이 컸다. 하지만 출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첼시플라워쇼에 도전을 하게 됐다.
이야기 셋_작품 너머, 숨겨져 있었던 이야기
사실 그녀가 애초에 접수했던 첫 작품은 'Quiet time:DMZ Forbidden Garden'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 때부터 그녀의 내공을 짐작했을까? 당신의 포트폴리오들과 작품을 보고, DMZ 작품이 내용이 참 좋지만 ‘쇼가든’보다는 ‘아티즌’으로 작은 정원부터 먼저 시도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시를 했고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문제는 수락 당시 작품전시 11일 전이었다는 것이다.
박: <해우소>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인가요?
황: 남은 11일 동안 수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화장실에 있었는데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꽃이나 나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꼭 이걸 꽃과 나무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통념을 넘어선 역설의 정원에 접근해본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화장실이라는 소재로 역설적으로 표현해보자. 또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정말 매력있지 않나. 사람이 만든 인분이 자연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것들이 식물을 살찌우고, 또 살찌운 식물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참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정원을 한다는 게 재밌어서 시도를 했다. 아마 한국이 아닌 영국이니깐 수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웃음).
박: 2010년, 아티즌 부분에서 금상과 최고의 정원상을 탔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황: 좀 전에도 언급을 했지만 난 공모전 수상 경험이 없다. 그래서 첼시플라워쇼에 출전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충분했다. 그런데 수상이라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첼시플라워쇼 수상은 BBC에서 깜짝 방문을 해서 알게 되었다. 갑자기 느닷없이 BBC에서 오더니 내가 Golden Medal을 수상했다며 수상소감을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 때 얼떨떨하기도 하고 실감이 안나서 어떤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리포터가 한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BBC에서 수상을 '개인이 아닌 한국의 승전보'라고 ‘KOREA WIN!'이란 표현을 썼다. 그 단순한 문장이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더라. 그 당시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국가애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느낌이라기 보다 쇼크에 가까웠다.
해우소_ 출처:RHS(영국 왕립 원예 협회)
이야기 넷_부딪힌 현실
영광스러운 금상수상과 small section 최고의 작가상을 수상한 황지해 작가는 그 다음해에 드디어
하지만 대한민국은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 개인 사비를 모조리 털어서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첼시플라워쇼에서 상을 타면 스폰서가 생긴다고 기대가 컸는데 불행하게도 그녀에게 지원해준다는 스폰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안타깝게 한국에는 첼시플라워쇼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할뿐더러 정원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 황 작가는 정부의 요직에 계신 분들께 직접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녀는 첼시플라워쇼에 대해 설명하고 작품을 제출하고자 하는데 스폰서가 필요하니 지원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들은 하나같이 ‘첼시플라워쇼가 무엇이냐?'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재를 털어 일을 하다 보니 집에서도 곱지 않은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절실했다.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기에 더욱 안타깝고 절박했다. 이대로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결국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곁에서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던 사람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아는 지인들에게 전화해서 지원을 요청을 했고 재원을 십시일반 마련하게 됐다.
이야기 다섯_그녀는 배워본 적이 없다.
유럽에서는 특히 황 작가의 독특한 자연주의 플랜팅 기법과 재료들이 화제가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알았을까? 그녀가 플랜팅 기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배워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오로지 그녀의 감성과 현장에서 체득한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절묘한 연출이 만들어낸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 황지해 표 ‘자연주의 플랜팅 기법’이 됐다. 때문에 작품을 연출할 때 그녀 혼자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더 많은 열정을 쏟아낼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첼시 플라워쇼에서는 작가가 도면대로 플랜터에게 식재하라고 시킨다고한다. 하지만 황 작가는 그들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직접 현장에서 스스로 직감을 이용해 디자인을 연출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서와 삶의 여정 속에 익어간 감성을 표현하는 것은 플랜터가 해줄수 없었다. 오죽하면 플랜터들이 ‘내가 네 머릿속을 어떻게 들여다보냐’라고 얘기하며 손사래를 치더란다. 40~50% 정도 차지했던 주요 식재는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대부분은 혼합된 기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완성시킬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도면으로 표기 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박: DMZ 정원 조성 당시 작업방식이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 정말 미친 듯 일을 했다. 7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각각 식물을 손에 들고 대기하고 있으면 나는 원하는 식물을 얘기하고 바로 바로 쥐어주는 방식으로 일을 했다. 직감이 강했다. 하지만 시간이 극도로 모자랐다. 정말 힘들었다. 완성시키기 까지 몇날 몇일 밤을 새며 계속 일했다. 이런 내 광기어린 모습은 작업과정에서부터 엄청난 화제 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참가자들한테 수많은 무시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그 당시 나는 완성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 밖에 것은 생각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박: 구체적인 식재와 표현 방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황: 주로 사용한 수종은 강원도에 있는 습지, 용늪에서 본 ‘개느삼(개능삼, 일명 개미풀)’이었다. 관목인데도 관목같지 않은 개느삼이 나에겐 굉장한 흥미로웠다.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이 식물이야말로 한국성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영국 외곽으로 나가서 노지에 있는 식물들을 퍼서 옮겨왔다. 물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조건 하에 퍼왔다. 자연성과 정밀묘사를 추구했던 나로서는 노지에서 발견한 영국의 식재들은 일하기 좋은 재료였다. 한국적 식생이 주가 되었고 나머지는 영국과 한국 식물들을 혼합해서 플랜팅했다.
여담으로 초소에 단 꼬인 전화선에 알맞은 식재가 무엇이 걸맞을까 생각했는데, 바로 ‘더덕’이었다. 근데 더덕이 생각보다 빨리 자라서 생각지도 않게 꼬인 전화선 위로 덩굴이 올라왔다. 그런 디테일에 심사위원들은 감탄하더라(웃음).
또 주제와 그 느낌을 살리려면 군대 물품들이 필요했다. 군화, 삭은 총알, 군대 벙커 등등의 재료들을 국방부에 요청하니 살상무기는 법규상 반출이 불가능하다고 답변이 왔다. 그래서 당일,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집시촌이었다. 삭은 그릇들과 동전들이 조금만 손보면 지뢰같이 보이기도 하고 잘 활용하면 좋은 재료가 될 것 같더라. 다행히 나는 원래 정크아트(Junk Art)를 활용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가난한 미술가들은 정크아트를 꽤나 좋은 재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웃음). 외국에도 생각보다 미술을 기반한 조경가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독창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다. 이런 디테일과 소품들이 완성도를 높여주는 일등공신이 아니었나 싶다.
(2회에 계속)
- 공동글·사진 _ 김봉진 녹색기자, 이주경 녹색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