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산업으로 피운 가장 아름다운 꽃, 환경조경-①

오휘영·정영선의 ‘영원한 동행’
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24-05-29

(좌)정영선 조경가, (우)오휘영 한양대 명예교수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경춘선숲길, 서울아산병원, 제주도 오설록 티뮤지엄, 양재천, 아모레퍼시픽 공중정원, 디올 성수... 익숙한 공간부터 핫플레이스까지 이 모든 공간이 ‘조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최근 영화, 전시, 예능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정영선 조경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독립 다큐멘터리로 5월 27일 기준 관객수 1만 7305명을 기록하며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는 주말 하루에 1,500명이 몰려 입구에 줄을 설 정도로 인기다. 이는 정영선 조경가의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 출연으로도 이어졌고, 다시 영화와 전시 관람으로 연결된다. 

 

관람객들과 얼굴을 맞대고 전시를 소개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김찬주 도슨트(환경과조경 기자 출신)에 의하면, 정영선展에는 일반적으로 미술관을 찾지 않는 관람객들이 많고,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인 관람객도 많다고 한다. 전국 각지, 심지어 제주에서까지도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온다고 하니 실로 그 인기가 대단하다. 관람객 중에는 자녀가 조경학과를 고민하기에 함께 전시를 보러와서 조경에 대해 이해한 뒤 진학하기로 했다는 사례도 있다.

 

이 같은 반응들은 국민들에게 ‘환경조경’이 대대적으로 각광 받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 기후위기, 팬데믹 등을 거치며 지구환경 문제 앞에 선 우리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환경조경’에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궤적은 1970년대 산업화시대에 국토 개발과 환경 보전이라는 한국현대조경사와 궤를 같이 한다. 환경조경을 국가산업의 반열에 올림과 동시에 환경조경 전문가 양성으로 산림, 건축, 환경조형, 원예, 정보통신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시킨 오휘영 조경담당비서관(현 한양대 명예교수)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물론 조경가 정영선도 오휘영 명예교수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하다.

 

환경조경을 국가제도에 따른 산업으로 인정·시행시킨 오휘영 명예교수와 이에 기반하여 가장 아름답고, 친환경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 국민들을 열광시킨 정영선 조경가의 첫 만남은 어떠했을까.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오휘영 명예교수와 정영선 조경가의 만남을 연재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의 손으로 꽃피운 우리 국토의 유산들은 세월이 갈수록 푸름을 더해가며 미래세대를 위해 자라고 있다. 이들은 환경조경으로 영원히 동행할 것이다.

 

 

오휘영과 정영선, 한국조경의 시작

 

 

 

5월의 어느 볕 좋은 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오휘영과 정영선이 만났다. 반가움의 포옹을 나눈 뒤 맞잡은 두 손은 한참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2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영선이 ‘주부생활’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선생님(오휘영)을 인터뷰하기 위해 당돌하게 청와대까지 찾아갔다. 그때 선생님으로부터 조만간 서울대에 환경대학원이 생기는데, 공부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를 그만두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가며 아무런 지원 없이 시작했다.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났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정영선은 자연과 더불어 자랐다. 16세에는 국어교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 마련된 사택에 거주했는데, 외국인 선교사가 짓고 가꾼 서양식 사택에서 선교사들이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보며 조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존 옴스비 사이먼즈의 『Landscape Architecture(1961)』를 보며 조경가의 꿈을 키웠고, 이후 경북대 영문학과와 서울대 농학과 모두 합격한 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학과를 선택했다. 그때 아버지와 막역하던 박목월 시인이 농학과에 진학할 수 있도록 가족을 설득하길 도왔다고 한다. ‘조경학’이라는 학문이 국내에 없던 시절이다.

 

그가 대학 졸업 이후 어릴 적부터 출중했던 글솜씨를 살려 ‘주부생활’ 잡지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여러 주택을 취재하던 때에, 청와대에서는 국토를 개발하는 한편, 환경 훼손을 방지하고 국토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방안에 골몰하고 있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이 시작되던 1972년 4월 18일, 청와대에서 ‘조경에 관한 세미나’가 개최됐고, 2주만인 5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1비서실에 2급 상당의 ‘조경담당비서관’ 임명기안을 재가, 5월 10일에 국가기관인 총무처(장관)에서 대통령 경제1비서실에 오휘영 조경담당비서관을 공식 인사 발령했다. 한양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조경학 전공(석사학위) 후, 당시 미국 시카고지역 녹지보호청(Cook County Forest Preserve District, Illinois, U.S.A)의 조경담당공무원으로 재직하던 그가 청와대 조경담당 비서관으로 부임하면서 조경이 국가제도적으로 육성·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경제1비서실은 경제기획원·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건설부·교통부(현 국토교통부),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업무를 각각 관장하며, 각 중앙정부 부·처의 가장 중요한 업무와 연결망을 갖는 직제로 구성되었으며, 조경담당비서실이라는 직제를 신설하여 경제1비서실의 경제, 재무, 상공, 건설, 교통 등의 비서관 직위와 동급인 부이사관급으로 발령한 것이다. 이는 조경분야가 중앙행정기관에 부·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부 부서의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조경’을 국가 정책으로 시행하고 육성해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국가 정책적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에 한국조경은 경제, 재무, 상공, 건설, 교통 등과 동등한 위상으로 협조·추진됐으며, 빠르게 성장한다. 무엇보다도 오휘영 조경담당 비서관은 조경분야 고급인재양성 중요하게 여겨 임용 첫해에 서울대학교에 환경대학원을 신설을 추진했다. 1972년 하반기 본격 추진하여 환경대학원을 비롯해 서울대 농과대학 조경학과, 영남대 공과대학 조경학과 설립인가를 받고, 이듬해인 ’73년 3월 1일자로 모두 설치 완료 후 신입생을 선발하면서 단기간 내에 교육체계를 구축했다. 그 사이에 오휘영과 정영선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정영선은 서울대 환경대학원 1기로 입학하게 되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오휘영은 청와대 조경담당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유일한 조경가로서 직접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오휘영)이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해 주셨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봤다. 전시가 끝날 무렵, 선생님 모시고 1-2회 졸업생들 한 번 모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1회 졸업생들은 정말 우수한 사람들이 모였다. 정부 정책으로 조경 전공자를 데려다 놓고 국토에 조경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일을 맡긴다 해도 그 사람 혼자 어떻게 하겠는가. 서울대 환경대학원 1회 졸업생들은 나와 함께 모든 것을 같이 한 사람들이다. 영문 교과서 번역부터 시방서 작성까지 조경 초기에 산업과 문화를 육성하기 위한 기초작업들을 함께 했다”

 

1975년 2월 조경학 석사로 배출된 정영선은 청주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의 교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청주대학교는 한강 이남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다. 전부 남자 교수들만 있던 곳에 처음 여성 교수로 부임하니 교수들부터가 우습게 알더라. 그때 선생님이 기 살려 주신다고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우리나라는 그때만 하더라도 여성 교수님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래서 지원사격을 나가 학생대표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정 선생에게 늘 지원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전했던 것이 벌써 50년 전 이야기다”

 

정영선은 환경대학원 졸업 후 1975년부터 청주대에서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서양조경사』(1979)를 집필하는 등 학문적 연구에 매진함과 동시에 1977년 충청북도 공원묘지 계획으로 실무를 시작했다. 1980년 여성 최초로 조경기술사를 취득하고, 조경설계를 시작, 1987년에는 조경설계회사 서안㈜을 창립해 지금까지 공공부터 민간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실시해오고 있다.

 

같은 시기 오휘영은 청와대 조경담당비서관으로서 한국조경학회 창립(1972.12), 「건축법」 개정(1972.12), 공무원교육(1973.03), 한국종합조경공사 설립(1974.07), 「건설업법(현 건설산업기본법) 시행령」 개정(1974), 「국가기술자격법 시행령」 개정(1974.10), 「기술용역육성법(현 엔지니어링산업 진흥법) 시행령」 개정(1977.07), 한국조경사회(현 (사)한국조경협회) 창립(1980.06) 등과 더불어 중앙정부 및 지자체와 교류·협력을 통해 조경관련 직제 등을 신설하는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1982년 국무총리실 제3행정조정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한양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로 부임, 조경산업 관련 전문인력 양성에 힘썼다. (2편 계속)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다른기사 보기
jj870904@nate.com
관련키워드l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가장많이본뉴스최근주요뉴스

  • 전체
  • 종합일반
  • 동정일정
  • 교육문화예술

인기통합정보

  • 기획연재
  • 설계공모프로젝트
  • 인터뷰취재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