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명사특강]서원우 박사의 나무와 문학[제12회]

시시(詩詩)한 나무이야기 ⑫
라펜트l강진솔 기자l기사입력2012-01-13

23. 겨울나무의 침묵과 묵시

낙엽 진 앙상한 가지가 겨울의 이정표처럼 손짓하고 있지만 첫눈이 내려야만 겨울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들뜨고 바쁜 십이월이다.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주고 나목(裸木)이 된 참나무는 침묵으로, 줄 것이 없는 소나무는 묵상으로 배려와 나눔을 고민하는 이웃이 되어야 따뜻한 겨울이 된다는 것을 나목과 상록이 묵시()하는 계절이다.

 

넓은 잎 낙엽수는 꽃피워 열매 맺어 무성한 잎으로 마음껏 태양에너지를 받아 알찬 결실로 아낌없이 보시(普施)하면서도 후대를 번영케 하고 미련 없이 나목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또한 좁은 잎 침엽수도 태양에너지를 절제되고 집약적으로 활용하여 성장한 후에 한겨울에는 이웃한 낙엽수에게 삭풍이 휘몰아 칠 때는 바람막이가 된다. 반면 낙엽수도 폭설이 내릴 때면 맨몸으로 함께 피해를 덜어주는 나눔의 이웃이 된다. 이처럼 침엽수와 활엽수가 우리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다문화인 숲의 다양성을 묵시하는 계절이다.

 

잎이 모두 떨어진 나목은 휴면하고 잎 푸른 상록은 묵상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모든 나무의 뿌리는 하나같이 처절한 고통과 위대한 사색의 숨을 쉬며 의식하고 있다. 이는 혹독한 겨울을 나는 모습이 마치 삶의 뿌리가 불교에서 여섯 가지 인식의 뿌리(六根)처럼 숨 쉬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여섯 가지 인식의 뿌리는 땅속이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안근(眼根), 귀로 들을 수 있는 이근(耳根), 코로 맡을 수 있는 비근(鼻根), 혀로 맛 볼 수 있는 설근(舌根),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身根), 그리고 깨어 있는 의근(意根)으로 한겨울의 나무는 마치 면벽참선하는 큰 스님의 모습 그 자체이다.

 

해마다 모든 이가 기다리는 첫눈의 기준을 위에 언급한 여섯 개의 인식의 뿌리에 적용해 본다. 조금 내려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첫눈이 되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면 그윽하고, 코로 맡을 수 있으면 향기롭고, 혀로 맛 볼 수 있으면 순수하고,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면 흡족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내린다면 영원히 젊고 설레는 첫사랑의 첫눈이 될 것이다.   

 

저무는 한 해의 앙상한 가지에 내리는 첫눈은 천상의 말없는 하얀 축복의 메시지처럼 가진 것 없는 이웃에게 따뜻한 배려를 하라는 나목과 상록의 침묵인 동시에 묵상이며 묵시의 순결한 언어이기도 하다.


신라 천 년의 불교문화를 꽃피운 황룡사 절터에서 바라본 저무는 한 해의 그윽한 일몰과 우주를 향한 불멸의 금자탑 첨성대가 영원히 해와 달과 별을 지켜보고 있는 위대한 민족문화의 우아, 무비, 유현한 자태.



신라천년의 뿌리 계림(시림)의 회화나무 밑동과 천년사찰의 뿌리 황룡사지의 당간지주가나무와 돌의 심원한 이치를 상현달이 이야기하고 있는 저무는 고도의 풍경.










24. 섣달의 향촌과 세모(歲暮)의 온정(溫情)

음력 십이월은 이십사절기의 마지막 절기가 드는 달로 극월(極月) 또는 납월(臘月)이라 하여 섣달을 달리 이르고 있다. 동짓달부터 많은 눈이 내린 산야는 그야말로 건곤일색의 깊은 겨울이다. 그러한 정경을 방랑시인 김삿갓이 금강산에 이르러 경허스님과 겨울의 정취를 주고받는 시구에서 먼저 경허스님이,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온천지가 희구나!’ 다음 김삿갓이, ‘산도 깊고 물도 깊으니 나그네 수심도 깊구나!(月白雪白天地白, 山深水深客愁深)’라는 시로 섣달의 정취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음력 십이월은 마지막 달이고 모든 일을 새해로 미룰 수 없는 시기다. 그렇기 때문에 새해가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지 않으면 더는 시간이 없음으로 우리의 속담에섣달이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라는 말처럼 섣달은 정월서부터 시작했던 농사일과 모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음을 사뢰는 뜻에서 동짓날부터 셋째 술일(戌日)을 납일(臘日)로 택하여 제사지내는, 이른바 납평제(臘平祭)를 올려야 하고, 이어서 조상을 모시는 새해맞이 준비로 몸과 마음이 바쁘고 들뜬 세모(歲暮)의 풍경이다.

 

요즘의 성탄절과 연말연시의 정취와는 또 다른 농경사회의 풍경이라 하겠다. 예나 다름없는 공통점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온정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사회지도층과 부유층의 책무라 할 수 있다. 옛말에뒤주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그 지역의 산세, 인적 물적 자원, 지방의 인심, 그리고 산수가 수려한 환경에서 성숙된 고장의 사람들일수록 지도층의 높은 도덕성과 사려 깊은 부유층이 곳간을 활짝 열고 양식을 나누어 주며 온정의 꽃을 피우는 섣달의 풍경이다.

 

향촌의 뒷동산 솔숲에 솔부엉이 우는 섣달그믐날의 정취를 고려시대 문신 안축(安軸)제야(除夜)’의 시에서등잔불 가물거리는 오래된 관청은 더욱 고요한데 / 나그네로 돌아다니다 보니 세밑의 근심을 견디기 어렵네 / 꿈에서 깨어나는 내일 아침이면 나이가 오십 / 밤 깊도록 베개 높이 베고 산가지를 세고 또 세어 보네라고 읊고 있다.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 과거 불우한 이웃에게 항상 배려와 나눔의 온정을 무려 300(12)에 걸쳐 베풀었던 기부문화의 상징적인 가문으로 전해오는 경주 교동의 속칭 최 부자집의 활짝 열린 대문과 뒤뜰 화계의 쪽문까지 활짝 열린 공간임을 생각하게 되는 세모.






강진솔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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